경험이 언어가 될 때

🔖 권력과 영합한 지식은 어떤 이들을 배제한다. 그리고 배제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원하는 형상으로 주제를 주조한다. 자본주의의 지식은 어떤 면에서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동시에 일하는 것이 행복이라며 장시간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들을 호명한다. 일하지 못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으로, 혹은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위치시킨다. 마찬가지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지식은 특정한 삶의 방식대로 사는 여성들을 칭찬하면서 추앙하는 한편, 어떤 여성들은 마녀로 낙인찍으며 권력의 주변부로 몰아내고 배제한다.

나는 우리가 지식을 생각할 때, 그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그러한 지식이 어떠한 존재들을 없는 존재로 가려내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지에 대해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찰이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특정한 방식을 되돌아봄으로써, 내가 어떠한 맥락에서 권력자로서 지식과 영합하는지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뻔하지만 되돌아보고 되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외연이 넓어질 수 있다. 소수자의 숙명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부터 바뀌어야 남이 바뀌는 법이다.

🔖 우리 모두가 돌봄을 해야만 한다면, 우리 모두가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느린‘ 시간성에 익숙해질 테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의 존하는 그 생명들을 떠올리며 타인의 느림에 조금 더 관대해 질 수 있다. 노동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은, 결국 지금보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의 양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출근시간이 조금 늦어지는 것에 더 이상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 빨라져만 가는 현대사회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물론 노동시간을 단축한다 하여 모든 문제가 급속도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편적 노동자를 돌봄노동자로 설정할 때,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있다. 홀로 아이를 낳은 수많은 여성들은 국가의 보육 시스템에 기대어 아이를 돌보면서 임금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들 또한 반려동물이나 자녀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하여 자신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자신에 대해 더 잘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미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도록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실직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는 일부 일자리를 없애는 데 이 기술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나누고,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우리가 원하는 곳에 쓸 수 있도록 재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배를 불리는 데 기술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직한 사람들을 구시대적이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 리는 그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삶을 위해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감시해야만 한다.

🔖 페미니즘적 시각은 단순히 여성으로 태어난다고 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세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훈련되고 학습된다. 그 지점 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쩌면 내가 마주하기 싫었던 나 의 민낮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나 자신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민낯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성장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보기에 페미니즘은 나르시시즘과 양립할 수 없다. 페미니즘적 시각은 나를 향한 자기애를 덜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체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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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에 수반되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편리한 방법으로는 불편함을 타인에게 전가하거나 무시하는 것 혹은 공감을 차단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생명이 젊어진 고통에 응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편을,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을 묻고, 그 답을 찾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삶에 적용해야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 타인에게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느끼는 고통에 내가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나의 삶을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